정부 지출 확 줄이고 세금•연금 뜯어고쳐
“강성 노동운동가 모습 그에게서 찾기 어렵다”
“500년 동안 우린 빚을 지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해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22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국회. 단상에 흰 수염의 남자가 올라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렇게 연설했다. 이웃 나라를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었다. 블룸버그 통신 보도다.
브라질의 기도 만테가 재무장관은 전날 1월 외환보유액이 1885억 달러로 처음으로 외채(1840억 달러)를 추월했다고 발표했다. 순채권국이 된 것이다. 룰라 대통령의 말처럼 500년 역사상 처음이다.
1980년대 브라질은 두 차례나 외채를 못 갚겠다고 나자빠졌다. 83년엔 이자는 줘도 원금을 갚기 힘들다고 했고, 87년엔 반대로 원금은 주겠지만 이자를 못 주겠다고 버텼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99년엔 통화(헤알화) 가치가 열흘 새 30%나 추락하기도 했다. 실업률은 치솟았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앞다퉈 브라질을 떠났다. 이런 나라가 순채권국이 된 것이다.
2003년 룰라 대통령 취임 후 브라질 경제는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다. 우선 수출이 3배로 늘었다. 무역 흑자도 거의 두 배가 됐다. 취임 첫 해 마이너스 0.2%였던 성장률은 지난해 4%를 넘었다. 미국 JP모건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브라질 채권 수익률(191%)은 에콰도르에 이어 세계 2위였다.
룰라 대통령의 등장은 처음엔 걱정거리였다. 2002년 대선 캠페인에서 골수 노동운동가 출신인 그가 1위를 달리자 미국 월가의 전문가들은 그가 당선되면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라며 경고했다. 취임 후 그는 월가의 이런 걱정이 기우였음을 보여줬다. 긴축재정으로 방만한 정부 지출을 줄였고, 세금과 연금 제도도 뜯어고쳤다. 2005년 방한한 그는 당시 김원기 국회의장을 방문해 북핵 문제를 언급하며 “지금은 폭탄보다 먹을 것과 직업이 더 필요한 세상”이라고 말했다. 브라질 국민은 이런 그를 신뢰했다. 집권 노동자당(PT)이 야당 의원들을 매수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지만 2006년 재선에 성공했다.
룰라 대통령은 2005년 방한에 앞서 중앙일보에 특별 기고한 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여러 모로 비슷하다”며 “노 대통령은 노동자를 위한 인권변호사 출신이고 나는 노조 지도자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3년이 흐른 지금 두 사람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룰라는 22일 아르헨티나 의회 연설에서 “외채를 끌어와 소비활동에 써선 안 된다”며 “남미 경제를 위해 발전•통신•철도와 같은 인프라 확충에 써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그에게서 강성 노동운동가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고 외신은 전한다.
무역흑자가 쌓여 결국 순채권국이 되면서 브라질의 통화 가치는 치솟고 있다. 이미 달러당 1.7헤알 선까지 올랐다. 99년 5월 이후 최고다. 국가 신용등급도 올해 안에 ‘투자 등급’으로 올라갈 것이란 예측이 늘고 있다.
중앙일보 김선하 기자 [odinelec@joongang.co.kr]